잊힌 미투(#MeToo), 17인의 증언자들
북한 거주 남한 출신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의 신상을 공개합니다
미투의 시초: 조선의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할머니
지금 대한민국은 촛불혁명에 이어 여성들이 주도하는 미투(#MeToo) 운동의 물결에 휩싸여 있습니다. 미투 운동이 성폭력을 고발하는 여성 인권운동이라면, 우리나라 여성이 주도해 세계의 양심을 일깨운 미투의 원조(元祖)는 김학순 할머니의 ‘커밍아웃’입니다.
천황제 일본 군국주의와 식민지 조선의 가부장제도 하에서 위안부(慰安婦)라는 이름으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김학순 할머니(1924~1997)는 1991년 8월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반세기 가까이 봉인된 끔찍한 성노예제도의 실상을 폭로하며 인류의 양심을 무지의 늪에서 깨웠습니다. 가해자인 일본 정부가 ‘일본군은 군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하자, 이에 격분한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덕분에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다른 나라의 피해자들도 앞다퉈 세상에 나왔습니다.
▲북한 최초 증언자 리경생 할머니 뉴스타파 목격자들 캡쳐
북한에서는 이듬해인 1992년 리경생 할머니(1917~2004)가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본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잠을 자면 옛날 일이 생각납니다. 피해 사실을 다 말하고 마음이 편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며칠을 고민하다가 방송사에 연락했습니다.”
텔레비전 전파를 탄 리경생 할머니의 증언 덕분에 북한의 피해 여성 219명이 용기를 내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습니다. 참고로 한국 정부에 등록된 피해 여성은 239명(사망 209명, 생존 30명, 2017년 2월 14일 현재)으로 거의 같은 수치입니다.
북한은 1995년 해방 50주년을 맞이해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약칭 종태위)가 《짓밟힌 인생의 웨침》이란 증언집(종군위안부 편)을 처음 펴냈습니다. 북한은 그후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피해 조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종태위의 후신인 ‘조선 일본군성노예 및 강제련행피해자문제 대책위원회(약칭 조대위)가 피해 발굴 사업을 진행해 현재 정부 등록 피해자는 219명으로 늘었으나 실명으로 공개증언한 피해 여성은 6명이 늘어난 46명입니다.
[시각화 자료1 -#미투의 시초: 조선의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할머니
놀라운 사실은 북한에서 발행한 증언집에서 공개증언한 41명을 전수조사한 결과, 무려 17명(41.5%)이 남한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전수조사 결과가 ‘놀라운’ 까닭은 남한 거주 ‘위안부’ 할머니들 중에서 북한 출신은 9.5%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르면 남한 출신 위안부 할머니들이 성노예 생활을 한 곳이 대부분 중국과 남방 국가에 걸쳐 있음에 비추어 보면, 해방 이후 중국에서 육로로 귀국한 이들의 상당수가 북한에 체류했고 남방에서 부산으로 귀국한 이들의 상당수가 고향을 등지고 북한으로 갔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라는 ‘괴물’이 조선의 처녀들을 덮친 것은 1930년대부터입니다. 10~20만 명으로 추산되는 ‘위안부’ 여성들이 만주로, 상해로, 남방으로 끌려갈 때 그들의 국적은 ‘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노예 생활에서 해방이 되어 조국에 돌아오니 외세에 의해 북조선과 남조선, 혹은 남한과 북한으로 두 동강이 나 있었습니다. 1945~1946년 귀국 당시 대부분이 20대였던 남한 출신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북한을 선택을 한 배경은 ‘2000년 도쿄 여성국제전범법정’에 제출한 남북공동기소장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족 성원 중의 한 명이 성노예인 경우 그 가정은 불명예와 수치를 면할 수 없었다. 귀국한 많은 여성들은 저들의 과거생활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을까봐 두려워 가족도 피해 다녔다. 그들은 이렇게 할 때만이 자기 가족을 수치와 불명예로부터 해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국가가 힘이 없어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결과임에도 자기 가족의 불명예와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17인의 잊힌 할머니’들이야말로 성노예제도의 ‘2차 피해자’들입니다.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나고 3차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지금, 이제라도 북한에 거주하는 남한 출신 피해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고향을 찾아줄 때입니다. ‘조대위’에 따르면, 공개증언 피해자의 70%가 이미 사망했으며 생존자들도 태반이 병상에 누워 있는 상태입니다.
이에 북한 거주 남한 출신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 17인의 신상을 공개합니다. 아래 신상공개 사진의 하단 맨오른쪽 사진에서 보듯,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집 《짓밟힌 인생의 웨침》의 표지인물(정금옥 할머니)도 남한 출신입니다. 가족의 ‘명예’를 위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잊힌 17인’에 대한 기억을 가진 분과 연고자들의 제보를 기대합니다.
▲17인의 사진, 맨위 왼쪽부터 리복녀, 박복이, 리현숙, 김군숙, 강영숙, 최순환. 중간 왼쪽부터 황선옥, 강길순, 곽금녀, 김복순, 정금옥, 김덕순. 맨아래 왼쪽부터 황소군, 김향숙, 심청옥, 고재련, 조삼순, 정금옥(증언집 표지)
[시각화 자료2 - #북한 거주 남한 출신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의 신상을 공개합니다
이름(위안부명) | 생몰 연도 | 출생지 | 가족관계 | 특이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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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복녀(하루꼬) | 1919~1993 | 경기 수원군 수원면 북수리 | 일찍 아버지 여의고 생활 | 중국 무단강[牡丹江]에서 연행 |
박복이 | 1926~? | 경남 진주군 문산면 개화동 | 개화동 구장의 취업사기 | 일본 귀환해 1960년 북송선 |
리현숙(후미꼬) | 1922~1993 | 서울 동대문 | 막벌이꾼 외동딸 | 시게이치라는 일본인 취업사기 |
김군숙 | 1923~? | 서울 | 15살(학생)때 피납 | 공원에서 동창 박경숙, 영자와 함께 피납 |
강영숙 | 1921~? | 전남 나주군 삼도면 | 중국 금주성 이주해 조실부모 | 중국에서 유부녀 신분에 피납 |
최순환(이치꼬) | 1921~? | 서울시 | 외동딸로 16살에 부모 사망 | 이복희(경주), 김순애(서울)와 취업사기 |
황선옥 | 1924~? | 경북 청도군 | 10살에 부친 여의고 중국 장춘행 | 동료는 영자(경상도), 아끼꼬(평남) |
강길순(아사꼬) | 1909~? | 전북 김제군 백구면 | 조실부모후 구장의 처녀공출 | 최고령자(대만 거쳐 인도네시아 위안소) |
곽금녀 | 1923~2007 | 충남 천안군 | 모친 고향 광주 제사공장에서 공출 | 동료 김덕녀(에이꼬), 이춘심(이미꼬) |
김복순 | 1917~1995 | 전북 부안군 줄포면 | 부 김성화, 모(母) 오씨의 맏딸 | 목포 술집에서 일본군 군함에 피납 |
정금옥 | 1924~? | 경북 영일군 신광면 상읍리 | 15살때 여관 종살이 하다가 연행 | 중국 대련 위안소 미요꼬 구타 사망 |
김덕순(기미꼬) | 1921~? | 전북 남원군 | 16살에 구장의 취업사기 | 내몽골 하이라루 위안소 |
황소군 | 1918~? | 경남 함양군 | 막벌이꾼 가정 6녀중 둘째 | 목단강 군수공장 위안소에서 43년에 탈출 |
김향숙 | 1927~? | 전남 광주 | 9남매중 일곱째로 부 여의고 종살이 | 44년 8월초에 중국 동북부 위안소 |
심청옥(미츠꼬) | 1919~? | 전북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 전주도립병원 간병원 근무 | 43년 9월 소만국경 위안소(동료 게이꼬) |
고재련 | 1925~ | 전북 고창군 흥덕면 후포리 | 6형제의 맏이로 광주방직공장 직포공 | 중국 안도현 위안소(동료 미요꼬, 히데꼬) |
조삼순 | 1919~ | 전남 나주군 문평면 | 3살에 부친 여의고 제사공장서 화상 | 18살에 취업사기로 싱가폴-미얀마 위안소 |